9월부터 크리스마스? 필리핀의 4개월 축제 ‘BER Months’ 이야기
9월, 세상에서 가장 먼저 크리스마스 가 시작되는 시간 'BER Months' 🎄
아직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상기후 탓인지 한낮의 햇살은 여전히 따갑기만 하네요. 곧 다가올 추석쯤은 되어야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달력은 이미 9월을 가리키고 있고, 제 마음속 시계는 이미 연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먼저 크리스마스가 찾아오는 곳을 꼽으라면 아마도 코스트코일 겁니다. 계절을 훌쩍 앞서가는 매장 한편에 일찌감치 자리 잡은 대형 트리와 화려한 장식들을 마주할 때면, 비로소 '아, 또 한 번의 시즌이 오고 있구나' 하고 실감하게 되죠. 보통 한국은 11월이 되어서야 온갖 행사가 열리기 시작하지만, 지구상에는 그 누구보다 빨리 크리스마스를 선언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필리핀입니다.
4개월간의 축제, 'BER Months'의 시작
필리핀 사람들에게 9월 1일은 특별합니다. 영어로 달(Month)을 표기할 때 '-ber'로 끝나는 9월(SeptemBER), 10월(OctoBER), 11월(NovemBER), 12월(DecemBER)을 통틀어 '버먼스(Ber Months)'라고 부르며, 이때부터 무려 4개월에 걸친 기나긴 크리스마스 시즌에 돌입합니다.
이들에게 버먼스는 단순한 달력 위의 날짜가 아닙니다. 팍팍한 일상 속에서 수고한 나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일찍부터 기뻐하고 축하할 권리를 부여하는, 일종의 '행복 선언'과도 같습니다.
필리핀의 크리스마스 를 채우는 따뜻한 풍경들
지구상에서 가장 긴 크리스마스 시즌을 보내는 만큼, 필리핀만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문화들이 이 기간을 수놓습니다.
- 🎤 크리스마스 의 목소리, 호세 마리 찬(Jose Mari Chan): 9월 1일이 되면 필리핀 전역의 라디오와 쇼핑몰에서는 약속이나 한 듯 이 가수의 캐럴이 흘러나옵니다. 그의 부드럽고 편안한 목소리는 "진짜 크리스마스 가 시작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신호탄입니다.
- ⭐ 희망의 별, 파롤(Parol): 대나무와 쌀 종이로 정성껏 만드는 별 모양의 전통 랜턴입니다. 집집마다 화려한 파롤을 걸어두며 어둠을 밝히고 희망을 기원합니다.
- 👼 천사들의 노랫소리, 팡앙아롤링(Pangangaroling): 버먼스 기간에는 아이들이 직접 만든 탬버린을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캐럴을 부릅니다. 골목 어귀에서 노래를 부르던 80~90년대 한국의 따뜻했던 풍경이 겹쳐 보여 뭉클해지기도 합니다.
- ⛪ 새벽을 깨우는 미사, 심방 가비(Simbang Gabi): 12월 16일부터 9일간 매일 새벽 성당에 모여 미사를 드립니다. 옹기종기 모여 따뜻한 쌀 케이크와 생강차를 나누어 먹으며 공동체의 정을 다집니다.
우리가 일찍부터 설레어도 되는 이유
어떤 이들은 묻습니다. 12월 25일 단 하루를 위해 넉 달 전부터 유난을 떨 필요가 있냐고 말이죠. 하지만 앞서 읽었던 어느 칼럼의 말처럼, 크리스마스 는 단순한 하루의 '휴일'이 아니라 하나의 '계절'입니다. 그 어떤 명절도 크리스마스 만큼의 벅찬 기대감과 반짝임,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끝없는 굴레처럼 돌아갑니다. 그 바쁜 순환 속에서 버먼스는 모퉁이를 도는 것과 같습니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리던 시간을 잠시 멈추고,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다가올 날들을 기대하며 미리 감사할 수 있는 여유. 그것이 바로 필리핀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크리스마스 를 선언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남들은 아직 반팔을 입는 9월에 무슨 캐럴이냐고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 방 한구석, 책상 위의 작은 소품들은 1년 내내 변함없이 크리스마스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이 블로그스팟 공간에서, 저 역시 당당하게 저만의 '버먼스'를 선언해 봅니다. 오늘부터 제 스피커에서는 더 큰 볼륨으로 캐럴이 흘러나올 예정입니다. 여러분도 이 설레는 기다림의 계절에 일찍부터 동참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미리 맞이하는 크리스마스 , 이렇게 시작해 보세요
- 나만의 '버먼스' 플레이리스트 만들기: 호세 마리 찬의 캐럴이나 평소 좋아하는 재즈 캐럴을 모아 9월부터 가볍게 들어보세요. 출퇴근길 공기가 다르게 느껴질 거예요.
- 가을 코스트코 방문하기: 본격적인 겨울이 오기 전, 9월과 10월은 코스트코에서 가장 예쁘고 상태 좋은 오너먼트와 대형 트리 장식을 여유롭게 고를 수 있는 숨겨진 황금기랍니다. 장보는 김에 크리스마스 기분도 듬뿍 내보세요!
- 책상 위 작은 소품 꺼내두기: 거창한 트리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예전에 사둔 작은 스노우볼이나 솔방울 하나만 올려두어도 바쁜 일상 속 작은 위로가 된답니다.